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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yordan6
  • 6시간 전
  • 3분 분량

우리는 언제부터 집에 마루를 깔기 시작했을까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마루를 선호해왔을까.

내 기억 속에서 마루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재료가 아니다. 대략 중학교 시절, 그러니까 1995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처음으로 바닥이 나무로 마감된 공간을 마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마루였던 것 같다. 그 전까지 바닥은 대부분 장판이었고, 장판은 바닥이라는 존재를 특별히 인식하게 만들지 않았다. 바닥은 늘 발 아래에 있었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벽과 가구, 창과 빛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의 바닥은 달랐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의 인상이 또렷하게 느껴졌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바닥이 공간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는 감각이 분명히 남았다. 그 경험은 이후 바닥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원목마루의 기원은 나의 기억보다 훨씬 앞선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나무를 실내로 들여왔다. 구조는 돌과 흙으로 만들고, 사람이 직접 닿는 부분에는 나무를 사용했다. 나무는 손으로 다루기 쉬웠고, 가공이 비교적 쉬웠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신체 감각과 가장 가까운 재료였다. 바닥에 나무를 깐 최초의 형태는 오늘날의 마루라기보다 널판지에 가까웠다. 이후 바닥의 나무는 점차 정리된 형태를 갖추게 된다. 판의 규격이 통일되고, 배열 방식이 체계화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마루라고 부르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런닝본드처럼 흐름을 만드는 방식도 있었고, 교차 방식처럼 방향을 분절하는 구성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 변화의 핵심은 형태의 진화가 아니라, 바닥이라는 위치에 나무라는 재료를 지속적으로 선택해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마루를 선호해온 이유는 특정한 시공 방식이나 패턴 때문이라기보다, 나무라는 재료가 가진 성질에 있다.

나무가 실내로 들어올 때, 공간은 즉각적으로 다른 감정을 만든다. 그리고 그 감정은 단순히 ‘따뜻해 보인다’ 같은 인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이 나무를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는 대체로 세 갈래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눈이 받아들이는 방식, 피부가 받아들이는 방식, 그리고 마음이 기억해온 방식이다.

먼저 시각이다. 나무는 시각적으로 과도한 긴장을 유발하지 않는다. 표면이 완전히 균일하지 않고, 미세한 차이를 내포한 채 공간을 채운다. 이 ‘미세한 차이’는 눈에게 흥미를 주지만, 동시에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금속이나 유리처럼 경계가 날카롭지 않고, 돌처럼 단단한 대비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래서 시선은 나무를 분석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눈이 긴장을 풀면, 공간 전체가 함께 느슨해진다.

그 다음은 촉각이다. 나무는 손과 피부에 닿을 때 반응이 부드럽다. 같은 온도에 놓여 있어도 나무는 돌이나 금속보다 덜 차갑게 느껴지고, 접촉하는 순간 ‘몸의 온도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적다. 바닥이라는 면은 결국 맨발, 종아리, 손바닥 같은 피부와 가장 자주 만나는 곳인데, 그 접촉감이 사람을 조용히 안심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나무 바닥 위에서는 몸이 ‘앉아도 되는 상태’로 쉽게 내려간다.

마지막은 심리적인 기억이다. 나무는 살아 있던 재료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의 경계심을 낮춘다. 완벽하게 동일한 표정을 반복하지 않고, 약간의 차이를 품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색과 표정이 변한다. 그 변화를 ‘결함’으로 보지 않고 ‘시간의 흐름’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재료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재료를 더 관대하게 대한다.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게 되고, 그만큼 나 자신도 조금 덜 긴장하게 된다.

또 하나를 덧붙이자면, 나무는 소리와 빛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편안함을 만든다. 바닥에서 울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튀기보다 한 번 눌려서 퍼지고, 빛도 거울처럼 반사하기보다 어느 정도 흡수된 채 부드럽게 남는다. 공간이 ‘반짝’하고 튀지 않으면, 사람의 감정도 덜 튄다. 이런 작은 물성이 쌓여서, 나무가 있는 실내는 결과적으로 더 조용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나무가 바닥에 놓인 공간에서는 시선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자세가 낮아지고, 바닥과의 거리가 줄어든다.

나 역시 바닥이 마루인 공간에 들어가면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아도 몸이 바닥 쪽으로 향한다. 소파보다 바닥에 앉는 장면이 먼저 떠오르고, 의자보다 바닥에 기대는 자세가 자연스럽다. 이는 마루의 배열 방식이나 디테일에서 비롯된 감정이라기보다, 바닥에 놓인 재료가 나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반응에 가깝다.

타일과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짧게 드러난다. 타일은 돌이다. 단단하고, 표정이 분명하며, 바닥이라는 위치를 안정적으로 고정한다. 그 위에서는 몸보다 시선이 먼저 작동하고, 머무르기보다는 이동하는 태도가 자연스럽다. 반면 나무는 본래 살아 있던 재료다. 완전히 동일하지 않고, 균질함보다 차이를 품고 있다. 이 차이가 공간 안에서 사람의 몸과 태도를 다르게 만든다.

우리가 오랫동안 마루를 선택해온 이유는, 나무가 바닥을 장식적인 요소가 아니라 신체가 반응하는 면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바닥이라는 가장 낮은 위치에 놓이면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감정과 연결되는 재료. 그래서 마루는 유행처럼 소비되지 않고, 세대를 거쳐 반복적으로 선택되어 왔다. 마루는 예쁘기 때문에 선택된 재료가 아니다. 나무라는 재료가 실내로, 그리고 바닥이라는 위치로 들어올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이 선택을 지속시켜 왔다. 바닥에 나무를 깐다는 것은, 공간을 어떻게 보일지 이전에, 그 공간에서 몸을 어떻게 두고 싶은지에 대한 아주 오래된 질문에 대한 응답에 가깝다.




[2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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