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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yordan6
  • 11월 12일
  • 2분 분량

왜 지구인인가?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나는 왜 이런 공간을 만들고 있지?”, “이 방식이 정말 맞는 걸까?”

익숙한 선택을 반복하다 보면, 때때로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이 흐릿해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구인garden’이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그 이름은 내게, 우리의 작업 방식과 태도를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일종의 기준선이자 출발점이다.

‘지구인’이라는 단어는 평소 대화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보통은 외계인의 존재를 상정해야만 등장하는, 조금은 낯선 말이다. 그래서 좋았다. 우리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대상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가장 낯설게 바라봐야 할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으로서의 시선이 아닌, 멀리서 떨어진 시점에서 나 자신과 우리가 만든 공간을 들여다보는 것.

그게 바로 ‘지구인’이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감각이다.

우리는 종종 디자인을 ‘나의 감각’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곤 한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과연 이 공간을 사용할 사람에게도 좋은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그 질문이 ‘지구인garden’이라는 이름에 담긴 철학과 연결된다.

지구인garden은 말하자면, ‘낯설게 바라보는 감각’을 키우는 연습장이다. 나 스스로를 디자이너로서 관찰하고, 공간을 사용자 입장이 아닌 외부의 시점에서 다시 바라보는 것. 내 감각이 아닌, 상황과 사람의 흐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태도.

그런 자세는 단순한 직관이나 미적 감각 이상으로, 디자인을 진정 사용자 중심의 사고로 이끈다.

이 이름을 붙인 이후로, 실제 작업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재료나 구성이 먼저 머릿속을 지배했다면, 지금은 “이 공간은 누구의 삶을 담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른다.

레이아웃 하나를 결정할 때도 그 기준이 다르다. 아름다움보다 우선하는 건 맥락과 리듬이고, 재료를 고를 때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 손에 닿는 느낌, 생활의 편안함을 더 우선시하게 된다.

디자인이라는 일은 때로는 감각의 투영으로만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철저한 관찰과 고찰의 결과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시작점이 ‘지구인’이다. 내가 아닌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는 일.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낯설게 보고, 낯설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사고들이 뿌리내리고 자라나는 정원이 바로 ‘garden’이다.

지구인garden이라는 이름에는 그래서, 우리 작업 방식의 뿌리와 줄기와 잎이 모두 들어 있다.

이름은 단지 상호가 아니라, 우리가 공간을 어떻게 대하고,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선언이다.

나는 오늘도 이 이름 덕분에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할 수 있었고, 덕분에 또 다른 형태의 공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디자인은 감각이 아니라 태도다.

그리고 그 태도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이름, ‘지구인garden’.

그 이름 안에서 나는 나를 계속 새롭게 낯설게, 그리고 정확하게 바라본다.


[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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