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yordan6
- 11월 11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11월 13일
나에게 현관이란?

현관은 그 집의 첫인상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아파트 구조에서 현관은 점점 작아지고, 단순히 신발을 벗는 공간 정도로 축소되고 있다. 구조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 이 공간이 얼마나 소홀히 여겨지는지에 주목하고 싶다. 요즘 아파트 구조는 대부분 비슷하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공동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복도를 지나 집 앞에 도착한다. 이 모든 여정을 지나 도착한 문 너머, 즉 우리 집의 시작점은 현관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이 집에서 가장 좁고 가장 무심한 공간이 바로 그 시작점이다. 넓은 공간은 거실 하나밖에 없다는 현실 속에서, 현관은 그저 '통과하는 곳'으로 치부되곤 한다.
우리는 모든 외부로부터의 긴장을 내려놓고 싶어서 집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첫 공간에서부터 숨 쉴 틈이 없다면, 과연 진정한 '집'이 될 수 있을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마주하는 공간이 좁고 어두우며, 충분한 여백이 없다면 우리의 몸은 그대로 긴장을 유지한 채 실내로 들어오게 된다. 넓은 거실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다. 그래서 집을 고를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거실의 면적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주거 동선 상 거실보다 먼저 만나는 공간이 현관이다. 거실은 온 가족이 모이는 중심이라면, 현관은 외부에서 내부로 넘어오는 경계의 문지방이다. 이곳이 넓고 여유롭다면, 사람의 몸과 마음은 자연스럽게 긴장에서 이완으로 전환된다. 반대로 협소하고 답답한 현관은 그 문턱을 넘는 이들에게 마치 어깨를 구부리고 들어오라는 듯한 메시지를 보낸다.
현관은 기능적 공간이자 동시에 상징적인 공간이다. 과거 전통 가옥에서 대문과 마루 사이의 '툇마루'가 있었듯, 현관은 외부 세계와 내부 공간을 가로지르는 완충지대이며 경계의 징표다. 이곳은 단순히 출입을 위한 물리적 통로가 아니라, 외부의 혼란과 피로를 잠시 내려놓고 내부의 질서와 안온함으로 들어서는 상징적 문턱이다. 넓은 현관은 단순한 여유가 아닌, 그 집이 사람과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말해준다. 누군가에게 열려 있는가, 바쁘게 닫혀 있는가, 그 집의 리듬과 성격이 이 공간에 담겨 있다.
현관의 크기는 단지 실용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 집이 외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부로 들어오는 사람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의 태도이기도 하다. 넓은 현관은 환대의 공간이다. 마치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혹은 집주인 스스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올 때, 작은 숨 돌림의 여유를 주는 장소가 된다. 또한, 현관이 단지 통과하는 공간이 아니라면,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행동들이 늘어난다. 벗은 신발을 잠시 두는 것 이상의 행위—가방을 내리고, 외투를 걸고, 하루의 먼지를 털어내는 의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물리적인 여유는 정신적인 여유를 낳고, 이는 다시 일상의 질을 변화시킨다. 현관이 넓어졌을 때 생기는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리듬'이다. 출근 전 바쁘게 나서는 아침에도,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저녁에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를 수 있는 속도의 전환점이 바로 그곳이다.
나는 현관이 넓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가구를 두기 위한 넓이가 아니라, 한 사람의 하루가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접히는 여유의 공간으로서. 그 여유가 누군가에겐 위안이 되고, 누군가에겐 새로운 하루의 준비가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면적이다. 현관이 넓다는 것은 결국 이 집이 얼마나 사려 깊은가를 보여주는 징후다. 보이지 않는 심리적 문턱을 낮추고, 환대와 이완의 시간을 허락하는 작은 공간. 나는 그 시작이 작아지지 않았으면 한다. 집의 크기가 작아질 수는 있어도, 마음을 맞이하는 태도만큼은 더 풍성해졌으면 좋겠다.
[2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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